1차(자캐)/퀼립 (탈퇴)

[맥]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with.란슬롯)

포도껍질 2015. 3. 7. 20:21



남자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저와 비슷한 몸집은 세월에 먹히어 기실 저보다 더 작아보일 법도 하건만,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가 사내의 키를 조금 더 커 보이게 하는 모양이었다. 중절모를 눌러썼던 머리카락이 살짝 눌려있었다. 손을 뻗어 차분히 가라앉아있는 머리칼을 잡고 손끝을 비비면 사락거리는 감촉이 퍽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재밌나? 하긴 아직 손장난이 즐거울 나이지."
"어이 아저씨, 난 좀 있으면 서른이라고!"
"난 내일 모레 쉰이라네."
 
 
어이쿠, 영감님이었네. 낄낄거리며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몸을 바로 돌린다. 사내의 무릎은 생각보다 편하였다. 바 천장에 박힌 전등이 눈부셔 인상을 찡그리자 까아만 장갑에 감싸인 남자의 손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흡사 자식을 향한 아버지같은 태도였다. 영감님, 소꿉놀이 좋아해? 뻣뻣하기 짝이 없을 것이 분명한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연륜의 껍질을 싸고 나오는 미소는 여전히 사내의 입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네는 어떤가? 되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온화했다. 낄낄낄. 어금니를 악문 채로 웃으면 폐로 공기가 들이차고 빠지었다. 웃음소리를 따라 배와 가슴이 들썩인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아는 것 하나없는 중년은 처음 합석을 시작할 때부터 부러 저를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 제가 입고있는 옷을 보자마자 풀린 동공이 일순간 수축하던 것을 기억한다. 이게 도발이라면 진짜 기발하기 짝이 없어. 


"근데 진짜 뭐하자는거야?"
"별로."


하는 행동이 마치 어린아이 같길래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고 있을 뿐일세.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등 뒤로 인자함이 넘치다 못해 후광이 비추었다. 캬, 쩌네! 천장의 빛을 등진 남자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이대로 내 가슴에 칼만 찌르지 말아달라고, 모르테 영감님. 손가락을 세워 제 왼가슴을 쿡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걱정말게나. 내 손아귀힘으로는 자네 심장까지 찌르지도 못할터이니."
"오, 세상에. 그렇게 늙었어, 우리 아빠?"
"네가 속을 썩였기 때문이란다, 아들아."


우리 제법 죽이 잘맞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퀘다로 오는 건 어때, 아빠? 남자의 셔츠깃을 만지막거리며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하였다. 그림자에 가리어진 사내의 눈동자 대신 설핏 보이는 입매가 조금 더 말려올라간다. 그건 안될 것 같구나. 단호하게 거절하는 남자를 향해 씨익, 하고. 마주 웃었다. 아들보다 직장상사를 택한 아빠따위 없는게 나아! 빼액하니 소리지르자 남자의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