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어렴풋이 한기가 느껴졌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것을 깨달아 몸을 더욱 둥글게 만다. 추워. 으슬으슬 어깨가 추워져 점차로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작게 끄응거리며 오른팔을 이불 밖으로 내어 휘적거렸다.손가락에 걸리는 전기담요 스위치를 끌어당겨 온도를 확인하자마자 온도계를 중간까지 올린다. 취침이라니 추울 수밖에 없잖아. 이불도 얇은데. 가슴 안으로 끌어당긴 무민을 세게 껴안았다. 추우니까 본능적으로 인형을 안고 잔 듯하였다. 이거 느낌 좋네. 어쩐지 누나가 몇 개나 사오더라니.
“일어나기 싫다...”
대꾸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방 안에서 제 목소리가 공기와 섞이었다. 주말이라 학교 갈 일도 없고. 아르고에서 내려진 지령도 없고. 누이는 삼일 째 연구소에서 철야 중이었다. 같이 놀기로 한 친구 녀석은 어젯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약속을 미뤄버려 오늘 하루가 완전히 붕 떠 버렸다. 공부나 할까 생각했지만 대학교 합격 통보를 받은 이상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 할 일 없어진 백수의 기분을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내 나이에 벌써 이런 걸 느끼면 안 될 것 같은데. 온도가 오르기 시작하는 침대에서 인형에 머리를 파묻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아홉 시 십칠 분.
계획 없이 시작된 하루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2.
냉장고를 열자 계란 두 알과 먹다 남은 더치커피가 눈에 보였다. 누나가 며칠째 귀가하지 않고 저도 밖에서 사먹기만 하니 반찬 같은 것이 냉장고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장 보고 와야겠네.”
두툼한 패딩에 팔을 꿴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삭막하기만 하였다.
3.
길거리에는 사람이 드문드문했다. 영하를 웃도는 날씨 탓이 틀림없었다. 군데군데 제설되지 않고 남은 눈이 서로 들러붙어 죽어간다. 신발에는 엉기다만 진흙이 군데군데 묻어버렸다. 하아. 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숨은 내뱉은 모양새가 마치 구름 같았다. 어깨를 움츠려 목을 패딩 안으로 한껏 밀어 넣고 언제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 항상 보던 골목길에는 못 보던 전단지가 붙어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누군가가 개를 잃어버린 듯하였다. 이런 날씨에 애완견이 밖에 나오면 큰일 나지 않을까. 어서 주인을 찾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진을 스쳐지나간다. 얼핏 본 사진 속 강아지는 제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무민 만큼이나 새하얬다.
4.
결국 마트까지 가서 산 것이라고는 레토르트 식품 몇 개와 누나의 술안주거리가 전부였다. 큼지막한 피자에 혹해 잠깐 갈등했으나 집에 둬봤자 금방 딱딱해질 것이 뻔해 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짐이 늘어나는 게 귀찮아서였지만 지적해줄 사람이 없으니 가볍게 자기합리화에 성공했다. 이제 집에 가서 냉장고 정리하고, 누나 먹을 육포랑 과자들 찬장에 넣어두고, 그리고,그리고. 이제 뭘 하면 좋지? 집에 있어봤자 항상 하는 거라고는 입시공부나 누나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전부였던 터라 정말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새로 나왔다는 게임을 할까 했지만 해보지 않아도 컴퓨터에 앉아 재미없어할 본인의 모습이 훤했다. TV? 재밌는 프로그램은 재방송 보려면 결제해야하니 그도 별로였다. 아, 하준우 빌어먹을 놈. 지가 약속 잡아놓고 바람맞히다니 진짜 나쁜 놈 아냐 이거. 괜시리 억울한 마음에 약속을 파토 낸 친구 놈을 원망해본다. 물론 그래봤자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하루를 알차게 보낼 방법 같은 것이 떠오를 리는 없었다.
손목에 건 하얀 비닐봉지를 붕붕 흔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한테 동물이라도 한 마리 키워보자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해본다. 강아지. 강아지가 좋겠어. 고양이는 내가 애교를 떨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강아지는 나한테 애교를 떨어줄 것 같아. 아직 허락도 맞지 않아놓고 이것저것 설레발치며 김칫국을 마신다. 하얀 애들이 좋지만 자주 목욕을 시켜야하나?금방 더러워질 것 같잖아. 저렇게.
킁킁거리며 전봇대의 냄새를 맡고 있는 작은 개를 보았다. 동물 특유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발목을 낚아챘다. 아마도 원래는 새하얬을 털은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깔끔하지 못하게 엉겨있었다. 계속해서 킁킁대던 녀석이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덕분에 눈이 마주쳤다. 눈매를 가득 채운 검은자위가 반질반질했다. 잠시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모양이 기뻐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자 제 앞에서 얌전히 선다. 헥헥, 하고. 혀를 내어 숨 쉬는 녀석의 입가로 계속해서 증기마냥 숨이 허공으로 퍼졌다.
"안녕?"
손을 들어 턱 밑을 긁어주자 눈을 감더니 곧 얼굴을 요리조리 흔든다. 나중에는 제 손 아래에 머리를 놓은 폼이 쓰다듬어줘,라고 분명하게 요구하는 듯하였다. 원하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눈을 감은 채로 꼬리를 흔들었다. 가까이서 본 녀석은 그렇게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몸이 좀 말라있었다. 사람에게 치대는 꼴이 인간에게 익숙한 것 같아 혹시 주인이 있는 개인가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목걸이라던가 하는 게 없었다.
"배고파?"
자꾸만 마트 봉투의 냄새를 맡는 모습에 앞발을 잡아 올려 묻자 그렇다는 듯 끼잉거린다. 어쩌지. 니가 먹을만한 건 없는데.사람 먹을 거 주면 안된다고 TV에서 그랬거든. 주머니를 뒤져 본다. 지갑에는 장을 보고 남은 돈이 얼마 들어있었다. 너 지금 배고픈거지? 주인은 없어? 앞발을 들어올린 채로 눈을 마주치며 물어본다. 고개를 슬쩍 돌리며 시선을 피하던 녀석이 갑자기 혀를 내어 제 볼을 핥았다. 나는 먹는 게 아냐, 바보야. 웃으며 하얀 털로 뒤덮인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크기만큼이나 가벼웠다. 동물은 역시 좋아. 따뜻하고, 귀엽고. 기분이 좋아져 패딩의 앞지퍼를 열었다. 추우니까 요 안에 있어. 얼굴만 빼꼼히 내밀게 하고 털이 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지퍼를 올린다. 안에다 실례하면 안돼. 손을 주머니에 넣어 개의 엉덩이를 받쳐주며 턱으로 머리를 살짝 찧자 녀석이 올려다보면서 제 턱을 다시 한 번 핥았다.
5.
바로 뒷길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골라온 캔을 따자 품속에 있는 녀석이 발버둥을 쳤다. 어어, 기다려. 이거 날카롭단 말이야.그릇이 없어 그냥 바닥에 떨어뜨린 닭고기 덩어리를 모아놓고 빈 캔 안에는 물을 담았다. 알았어, 알았어.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녀석을 패딩 안에서 꺼내 바닥에 내려주자 허겁지겁 바닥에 고개를 파묻는다.
"너 진짜 배고팠구나."
쪼그려 앉아 무릎을 안은 채로 열심히 먹는 모습을 쳐다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풀어놓고 키우는 개일 수도 있어 아까의 장소로 되돌아왔지만 주점뿐이 없는 골목은 사람 하나 없이 휑하기만 하다. 가게에서 보살펴주는 개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데려가면 안 될 것이 당연했고, 무엇보다 불쌍해 보인다고 데려갔다가 누나가 반대하기라도 하면 센터로 보내야 할텐데 잘 살고 있는 녀석을 센터로 보냈다가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당할 수도 있었다. 저의 판단으로 목숨 하나가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래도 잠깐 얼굴 봤다고 정이 들었는지, 데려가진 못하겠지만 가끔 와서 뭐라도 먹일까 싶은 마음이 커지었다.
"너 진짜 주인 어딨어, 있기는 해?"
"아이고 우리 흰둥이!"
깨애애애ㅐㅐㅐ애애앵! 쑤욱, 하고. 제 뒤로 빨간 체크무늬에 덮힌 팔이 물로 입가심하던 강아지를 번쩍 들어올렸다. 높이 우는 개의 비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폴짝거리면서 제 앞으로 튀어나왔다. 감격에 찬 듯 한 뒤통수는 검은 모자에 가려져 있다.쭉 뻗은 손에 들려진 강아지가 기겁을 하며 울었다. 심바를 들어 올린 라피키같은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꿇더니 이번에는 춤추듯이 빙글빙글 돈다. 어어, 말려야할 것 같은데.
"저어..."
"우리 겸둥이! 오디 갔었어어~? 어? 이 오빠가 말야! 어? 얼마나 찾았는지 알긔 모르긔? 아 오빠가 아니라 형인가? 우리 흰둥이 암컷이었니 수컷이었니?"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개를 옆구리에 꽉 끼우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종이쪼가리 하나를 펼쳐드는 남자를 한번, 옆구리에서 서럽게 울며 귀와 꼬리를 한껏 만 강아지를 한번. 그렇게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강아지를 구해줘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목소리부터가 저보다 어른인 티가 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와중에 여자애구나! 맞게 찾았네. 하고 결론을 낸 목소리가 들리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아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 남자의 옆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내가 홰액, 하고. 몸을 돌리며 저에게 걸어왔다. 가까워진 남자는 생각만큼 크지는 않아보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꺼려지는 분위기가 돌았다. 흐음. 눈을 내려깔며 쪼그려 앉은 저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정말 급작스럽게 표정을 바꾸어 웃었다. 관찰당하는 듯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져 맥이 풀린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쥔 손 안이 축축했다. 가슴이 심하게 뛰어 숨쉬기가 힘들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우리 학생은 뭐야, 개도둑이신가?"
"아뇨 그, 얘 주인이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치만 아는 개지!"
그치 우리 흰둥이? 울 애기 오빠 알지? 모른다고? 괜찮아 니 주인이 나를 아니까!! 깔깔거리며 강아지를 다시 안아 올린다. 품에 안긴 개는 여전히 꼬리가 말려있었다.
"개가 너무 무서워하는데.."
"아 내가 찾는 개 맞아!"
함 봐봐! 맞으니까! 저를 보며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무시하지 못하고 한마디 하자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제 눈앞까지 들이밀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아까 스쳐지나간 전단지였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난 사진 속 강아지를 다시 한 번 보다 정체모를 사내 품에서 떨고 있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약간 지저분해진 털 말고는 사진 속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미아된 애였구나.. 허탈하게 읊조리자 남자가 어깨를 피며 한쪽 눈을 찡긋거린다. 그래! 우리 흰둥이! 우쭈쭈쭈! 아참 그보다 뭐야!
"네?"
"너 우리 흰둥이한테 밥 준거야?"
"아, 저, 죄송해요. 배고파보여서.."
"쩐다!"
"예?"
"미친! 되게 착하네! 길거리 개한테 용돈을 털어 밥을 사주는 고딩이라니! 개짱이다!"
직설적인 칭찬에 정신이 멍해져 멍청하게 쳐다보자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봐도 자기는 이미 얘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개를 들고 쪽쪽 입을 맞춘다. 폭풍 같은 행동거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자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 고개를 들어올린다. 깜짝 놀라 순간 뒷걸음을 쳤다. 그런 저를 보고 또 깔깔 웃는 모습이 첫인상과는 달리 유쾌해보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나이 들고 빨라지는 건 시간뿐이지 역시!"
"저기."
"미안, 소년! 소년의 선행은 잊지 않겠어!"
"에."
"난 그럼 볼일이 급해서 이만! 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줘!"
돈만 주면 뭐든지 해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찡긋, 하고. 개구진 얼굴로 윙크를 날린 남자가 기죽은 강아지를 옆구리에 꿰고는 팔랑팔랑 가볍게 뛰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손에는 남자가 쥐어주고 간 명함 하나가 달랑, 들려있었다.
6.
몸을 일으켜 세운다. 장을 봤던 봉투들을 들고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벌써 노을이 발갛게 지고있다. 지갑을 꺼내 받은 명함을 집어넣었다. 입을 열어 아마도 남자의 이름일 단어를 소리내어 불러본다. 돌아오는 대답소리는 없었다.
-공미포 420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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