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이게."


영화에서나 보던 것 같은 로맨틱의 극치가 제 눈 앞에 있었다.

아롱거리는 촛불 몇개가 은은하게 식탁 위를 비추었다. 전문 셰프가 직접 와서 만들었다는 요리는 연한 주황색 조명때문인지 더 윤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돈지랄이다 차암.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역시 걸리는 기념일따위는 없었다. 어제 간만에 밥 차려줬더니 그거 먹고 시위하나 지금? 어찌되었든 배는 고팠고 눈 앞에는 음식이 있었다. 내 돈 쓴건도 아닌데 사실 상관없지. 어느새 앉아 냅킨을 펼치는 제 남편을 바라보다 의자를 뒤로 빼내었다. 끼익, 하고. 바닥을 긁는 의자 소리에 해리가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민."
"웃지마, 정들어."


진한 쌍커풀때문인지 더 처져보이는 눈매는 날카로움을 유지한 채 반달모양으로 휜다. 제가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온 평생을 스트레잇으로 살던 제가 같은 물건이 달린 남자에게 발목잡혀서 온갖 개고생을 하게 만들었던 얼굴이기도 했다. 색이 옅은 눈동자는 촛불색에 먹히어 산호색처럼 보인다. 색 이쁘네. 살풋이 웃는 파리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래, 조미료만 왕창 들어가는 내 음식먹느니 제대로 된 걸 먹어야 저 얼굴에 혈색이 조금이라도 더 돌지 않겠어. 가지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를 뒤적거리면 제 앞접시를 가볍게 들어올린 해리가 샐러드를 퍼올려준다. 많이 먹어.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다. 외모와 다르게 저음을 유지하는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서 곤란했다. 


"나는."
"으응?"
"형이 해준 음식이 더 좋은데."


사귀게 되고 초창기에 한번인가 두번인가 해주었던 경양식의 음식을 생각하고 말하면 다크써클이 내려앉은 눈매가 잠깐 커졌다 이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손목뼈가 도드라진 손을 들어 본인의 오른뺨을 긁다, 턱을 쓸다, 이내에는 턱을 괴며 샐러드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르고 길쭉길쭉해서 그런가 그냥 움직이는 것도 무슨 존나 모델이세요. 저의 눈에 씌인 콩깍지를 뗄 생각도 없이 해리의 모습을 감상한다. 


"와우."
"어엉?"
"우리 민이 내 음식을 그렇게 좋아해주는지는 몰랐는데..."
"지랄."
"애교부리며언."
"됐거든."
"디저트는 해줄건데."


애교 부리면. 탄식하듯 느릿하게 말하는 주제에 의사전달은 확실히 하는 꼬라지를 보며 잘려진 가지를 포크로 거칠게 찍었다. 철근을 씹듯이 강하게 우물거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즐. 그럴 바엔 형 카드들고 디저트 가게를 가지, 내가. 저의 재스쳐에도 가볍게 웃고 마는 저의 사랑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특별하게 차려진 저녁식탁 위로 옅은 웃음 소리가 퍼졌다.

나쁘지 않은 저녁이었다. 


--


by 포도껍질 2015. 7. 28. 11:33


덜컹, 하고. 버스가 흔들리는 느낌에 설핏 잠이 깨었다. 몇시지. 느리게 시야에 박히는 주황색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불빛이 내려앉은 풍경이 어두웠다. 잘 안보여.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제대로 상이 맺히지가 않아 꾸욱하니 눈꺼풀을 닫았다 열어보았다.


'열시...'


한층 맑아진 눈으로 버스 상단에서 빛나고 있는 녹색 전자시계를 보면 정확히 열시 정각이었다. 부산에서 버스를 탄지 어림잡아 4시간이 지난 시간이다. 끄으, 피곤해 뒈질 것 같네. 뻑뻑한 눈 위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어느새 차가워진 손 끝이 눈가의 열기로 미지근하게 덥혀지었다. 한껏 뒤로 젖혔던 의자를 약간 앞으로 당기며 몸을 움직이자 몇시간이나 같은 자세로 고정되었던 근육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창 밖은 어느새 건물들이 내는 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무궁화보다 빠르네. 벌써 서울인가. 타려했던 KTX의 좌석이 한달도 전에 털려버려 어쩔 수 없이 탔던 낡은 기차를 떠올린다.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나고, 생각보다 많이 덜컹거렸던 열차는 사람들의 원성이 이해가 갈 정도로 느려터져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도 넘게 걸렸던 기억이 났다. 


"시이바알..."


출장같은건 차편 좀 알아봐주고 보내란 말이야. 한달 전에 알려주던가. 아니 진짜 빌어먹을. 특실까지 다 털려있을건 뭐람. 그 더럽게 비싸고 편하지도 않은 개택시 특실이 뭐가 좋다고 다들 예매를 하고 앉았어. 아직 잠들어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버스 안에서 웅얼거리듯 욕설을 뱉으면 1인석에 앉은 제 옆자리의 커플이 흘깃거리는 꼴이 보였다. 무얼 쳐보고 자빠졌냐는 뜻으로 눈을 흘기자 금새 고개를 돌리는 폼들이 우습지도 않았다. 

술 땡긴다. 금요일인데. 내일 출근 안해도 된댔는데. 서울로 진입한 버스 안에서 깨어버린 머리를 굴리며 지금의 피로를 어떻게든 상쇄시킬 궁리를 해본다. 기실 그냥 택시타고 집으로 돌아가 대충 씻고 기절하듯 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출장처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비위를 맞추느라 엉켜버린 속알맹이가 그렇게도 간절히 알콜을 달라 아우성인지 위가 뜨거울 지경이었다. 


'진영이 형은 게라클 하고 있으려나. 부르면 나올까.'


얼마 전 게라클 - 하민은 미라클 베타서버를 얼마 전부터 게이천국 미라클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서 만난 저의 오랜 지인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는 게임에서 참으로 즐거운 듯이 노닐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뭐든 고까워 보이는 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 그렇다고 치기로 이미 마음의 동의를 얻은 터라 진영이 뭐라 말해도 야동보다 들킨 형의 변명수준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예정이었다. 진영이 그런 걸로 무어라 변명할 타입도 아닌지라 정하민 마음 속에 박힌 [게라클에서 즐거운 게이라이프를 즐기는 진영이 형]이라는 타이틀은 당분간 이어질 듯 싶었다. 


[삼겹살에 소주먹고싶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답이 오면 먹고, 아니면 그대로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고.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카톡을 날려보며 익숙한 거리로 들어서는 버스에 몸을 뉘였다. 내리고나서도 한참을 택시타는 줄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릴 생각을 하니 더욱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다지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따라 당기네. 피곤이 쌓이고 쌓여 더부룩하게 위 속을 채우는듯해 입을 벌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뜨겁게 익은 날숨이 지나간 입 안이 더웠다. 

크게 코너를 도는 버스의 밖으로 터미널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깨어난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안전벨트를 끌르는 소리 속에서 지잉, 하고. 진동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이 짧게 울리는 감촉이 손 안에서 느껴졌다.

[니가 쏘면 콜]

이 형은 날 못벗겨먹어서 안달이 났나, 뭐 만날천날 사달래. 어차피 부르는 것은 저였기에 계산도 제가 할 생각이었지만 괜히 한번 혀를 차본다. [대신 우리 동네] 긍정을 표하는 답을 하기가 무섭게 숫자 1이 사라지고 바로 답이 날아왔다. 보지 않아도 될 카톡을 무시한 채로 다리 사이에 놓았던 가방을 들어올리었다. 버스는 어느새 멈춰 서고있었다.



-


by 포도껍질 2015. 7. 28. 11:32


1.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어제 출근길만 해도 고개를 들면 분홍색 꽃가지가 흔들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밤새 내린 비는 땅으로 꺼져 죽은 웅덩이의 비린내를 풍기고있었다. 물방울에 처맞아 아래로 추락한 꽃잎들이 바닥을 수놓는다. 

시선을 올려 위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꽃덩어리들이 볼품없었다. 



2.

이번 해에도 꽃놀이는 꽝이었다. 어차피 올해에는 같이 갈 여자도 없지만. 



3.

선심쓰는 듯한 말투에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이 올라갔다. 메시지창에 대고 엿을 날리는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보일지는 정하민이 알 바 아니었고,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왕 계승식이라는 단어 한가지 뿐이었다. 요정이라 이거지. 쭉빵 엘프가 나와준다면 바랄 바가 없을텐데. 

한줄기 기대를 걸며 날짜를 확인한다. 아오, 미친. 월요일이네. 하필이면 일이 제일 많이 몰리는 월요일 밤이 이벤트 날인지라 뒤통수를 긁었다. 뭐어, 꼭 봐야하는 것도 아니고. 운 좋으면 보고 아니면 말면 되겠지. 딱 그정도의 이벤트인지라 뒷목을 주물렀다.



4.

그리고 생각보다 제 운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확 인상을 구기자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이 형은 게이였지. 요새 연락이 안된다 했더니 게이천국에서 놀고 계셨어?


"미니미니, 너 왜 여기 있냐...?"


정말 꽉막힌 동네야, 여기는. 시발 게이만 게이콘텐츠를 이용하라는 법이 대한민국 헌법 어디에 써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짜증을 내자 쌍꺼풀없는 더러운 눈매가 확 올라갔다가 이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저만큼이나 성질 더럽게 생겼지만 그렇게 개차반은 아닌 형인지라 제 짜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과연 황진영답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뭐라 말하는 것들을 대충 흘러 대답하며 씨익 웃었다. 보아하니 저 형도 혼자고. 나도 혼자고. 게이들한테 헌딩당할 거 방해하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나 편할게 먼저니까.


"어이구, 형님은 나랑 그렇게 데이트가 하고싶으신가봐?"


아마도 죽빵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야비해보일 것이 분명한 얼굴로 이죽거리며 말하자 콧방귀와 함께 턱짓하는 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제가 여자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눈동자가 저를 보고있었다. 우웩.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얼른 진영의 손목을 잡아채 걸음을 옮기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마도 시간이 되었는지 물안개와 함께 몽환적인 정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를 두고 척척 걸어가는 까만 뒤통수를 따라 발을 움직인다. 걷는 족족 자그마한 요정들이 까르르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5.

솜씨좋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요정은 여왕이 되었다. 크기가 작을 뿐 인간 여성과 다르지 않은 몸을 가진 여왕이 웃었다. 누굴 참고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절세미인 뺨을 후려치는 자그마한 미인은 마치 꽃송이같았다. 주위에 몰려있던 요정들이 탄성과 웃음을 뿌리며 유저들에게 떨어진 꽃봉오리며 과일들을 선물한다. 저에게도 무언가를 계속 안겨주는 요정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진영을 찾아 시선을 돌리었다. 나가고 싶었다. 역시 저는 작은 생물과는 선천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형."
"엉?"
"삼겹살에 소주나 하러 가자."
"나 내일 출근하는데."


저도 출근이거든요. 흡사 본인만 출근하는것 같은 말투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짜증낼 기력까지 억지로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억지로 성불당하는 악령이 된 듯한 기분이야. 요정들의 축제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요지부동인 진영의 팔을 잡아끈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에 대고 이를 간다. 아, 진짜!


"내가 산다니까!"



6.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콜을 외치는 진영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것을 어거지로 참으며 로그아웃 하자 바로 걸려오는 전화를 확인한다. 진영이형님. 저번에 내 폰을 잡고 뭘하나 했더니 이름을 바꿔놓으셨어요? 허탈한 웃음과 함꼐 통화버튼을 누른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디로 가면 되냐?


"어디긴 어디야. 내일 출근아니면 우리동네로 오라할텐데. 걍 중간에서 보자."
"오냐, 그럼 합정?"
"어어."


자리에 일어나 대충 손에 집히는 아우터에 팔을 꿰며 바로 나와, 하자 알았다며 통화를 끊는다. 아, 모르겠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형만한 아우없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간만에 진영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피로감에 묶여 질질 끌리었다. 




by 포도껍질 2015. 7. 28. 11:32


1.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올라가야할 계단이 잔뜩이었다.



2.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가 망가졌다는 공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발겼어야 했다는 후회를 마른 숨과 함께 뱉어낸다. 씩씩 내뱉고 들이마시는 숨이 뜨거웠다. 열에 말라버린 울대를 어거지로 움직여 침을 삼키면 목 언저리에서 따끔한 피 맛이 돌았다. 시이, 바알! 마지막 계단을 올라오며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었다. 고작해봐야 7층까지 올라온 것 치고는 몸이 너무 힘들어 굽혔던 허리를 피어 좌우로 돌리자 뻣뻣하게 굳은 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 아파왔다.


"흐, 시발. 뒈지겠네. 진짜로."


힘겹게 헐떡이는 숨이 버거워 넥타이를 끌러내렸다. 제가 생각해도 심각할 정도로 저질적인 체력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운동을, 다시 해야하나. 언젠가 체력을 기르지 않으면 과로사로 죽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덜컥 등록해뒀던 헬스장이 떠올랐다. 나름 꾸준히 다녀보고자 했던 집 근처 헬스장은 결국 한달도 채우지 못한 채 회원권만 지갑 깊숙한 곳에 박혀있을 것이었다. 야근때문에 하루를 빠지기 시작한 운동은 그 다음날부터 귀찮음에 깔아뭉개어져 실천의지따위 멀리 도망간지 오래였다. 벌벌 떨려오는 종아리를 매만지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카드들과 함께 지갑 어느 한구석에 꽂혀있을 헬스장 회원카드를 생각한다. 내일부터 운동이나 다니자. 짧은 한숨과 함께 현관문 번호를 눌렀다. 숫자를 누르는 손 끝이 떨리고 있었다. 



3.

새로 상장했다는 거래처는 드디어 체계가 잡히고 있음인지 요근래 들어 그 빌어먹을 회사로 인한 야근이 꽤나 줄어들었다. 만날 이랬으면 좋겠네. 뻑뻑한 눈꺼풀을 문지르며 헬스장 안으로 들어선다. 몇달 만에 왔음에도 여전히 깔끔한 카운터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보다 마음에 든 건 예쁘장한 접수원이었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접수처 여자가 예쁜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물 먹은 솜마냥 피곤한 몸은 남자의 본능까지 꺽게 만들었다. 어쩐지 모든 것이 피곤해져 하민은 한숨을 쉬었다. 뱉어낸 날숨으로 미처 내보내지 못한 묙지거리가 달라붙어 진흙처럼 땅에 처박히었다. 아아, 그냥 빨리 끝내고 가서 자고싶다. 


"그냥 일단 3개월 등록으로 해주세요."
"어머, 6개월로 하시면 할인이 더,"
"3개월이요."


몰려드는 피로함에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귀찮음을 담뿍 담아 잘라 말하자 얼굴만큼 귀여운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하던 접수원의 말문이 끊기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금액이며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아가씨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생각한다. 개인 PT라도 받는 게 나을라나. 

여가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적금이며 연금마냥 묶이는 돈이 있더라도 갈 곳 없이 붕 뜨는 여윳돈이 항상 생긴다는 의미다. 하민은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려 소비용 통장의 잔고를 떠올렸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왕하는거 개인 코치랑 하면 그나마 덜 빠지지 않을까.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잠시간 고민을 해본다. 여전히 조잘거리는 접수원의 치열이 가지런했다. 



4.

"개인  PT는 제 마음대로 시간정할 수 있어요?"



5.

안녕하세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남자에게 고개를 까닥이자 무뚝뚝해보이는 인상 그대로 맞인사가 왔다. 이마에 난 상처까지 아주 여러가지로 남자다움을 광고하는 듯한 사내였다. 짙은 피부 위로 곱슬거리는 까만머리가 보였다. 나도 짧게 칠까. 곧 여름이라 더울텐데. 무의식적으로 제 머리칼을 만지며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는 남자의 손을 바라본다. 마디 굵은 손가락이 가느다란 펜대를 꾹꾹 눌러가며 시간이며 날짜 같은 것을 적고 있었다.


"일단 저하고 시간을 정하셔야 합니다. 식단도 짜드릴텐데 최대한 지며주시는 편이 좋고..."
"제가 좀 시간이 들쭉날쭉 할 것 같은데요."


으음, 하고. 남자의 짙은 눈썹이 곤란하다는 듯 찡그려졌다. 다른 일이 있으시거나 하시면 가능한 몇시간 전에라도 연락을 해주시고, 다른 분들과 시간이 겹치지 않는 선에서 조절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똑바로 저를 마주하는 눈동자에 수긍의 표시를 건내자 계속해서 무언가 - 아마도 저의 식단인듯한- 를 적어내리는 남자의 손은 사내놈 손 답게 선이 두껍게 휘어져 있었다. 제 손보다 반 개는 더 클법한 손을 내리 쳐다보다 몸매가 드러나는 상반신을 훑는다. 과연 헬스 트레이너답게 균형잡힌 몸이 여자 여럿 울렸을 성 싶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메모를 끝냈는지 펜을 내려늫으며 대신 작은 명함을 쥐어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궁금한 점이나 문의하실 일 있으면 카톡이나 전화주시면 됩니다. 표정만큼이나 진중한 목소리가 귓가에 물린다. 남궁 엽. 남자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삼키며 고개를 든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담긴 얼굴에서 사내의 성격이 엿보이는 듯 했다. 조용조용한 형씨고만. 고개를 끄덕이면 저 역시 명함을 건내주었다. 앞으로 잘부탁합니다. 인사치레로 맞닿은 손이 따뜻했다. 




-


by 포도껍질 2015. 7. 28. 11:31



1.

"베타서버는 운영자 말투가 존나 참 게이같아."


호모들전용 서버라 그런가. 스마일을 통해 확인한 공지사항을 읽어내려갈수록 소름이 돋아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이번 이벤트가 마담과 관련이 있다는 문장 뿐이다.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클럽의 주인을 떠올린다. 적당한 체구에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풍만함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났다. 제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져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매력적인 여자였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등이 아파와 기대어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떼었다. 클럽 맵을 선택하자 접속 여부를 묻는 반투명한 창이 떠오른다. 별 생각 없이 yes를 누르면 시야가 이지러들었다. 음악이 쿵쿵거리며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가 점차 뚜렷해진다. 흔들리는 풍경으로 머리가 아픈 착각에 빠지었다. 빙글거리는 세상이 싫어 꾸욱 감았던 눈을 뜨자 점점이 반짝이는 지하의 공간이 보인다. 저번 커플이벤트 이후로 처음 방문한 클럽은 여전히 농도 깊게 끈적거리는 어두움이 발 아래로 가라 앉아있었다. 그 짙은 그림자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가벼운 분위기가 알맹이처럼 두둥실 맴도는 것이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이게 좋은 거지. 현실과 유리된 감각. 하루종일 일에 쫓기어 식사도 수면도 모두 엉망진창으로 바짝 조여지는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질척하게 녹아있는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지난 번과 달리 군데군데 보이는 여성 NPC 들이 무척이나 눈을 즐겁게 했다.



2.

보라색 조명 아래로 헐벗은 인공지능들이 몸을 밀착시키며 섹스어필을 하는 모습이 사방에서 보여졌다. 이 중에 몇 명이나 플레이어일까. 생각해봤지만 의외로 홀에 나가 춤을 추는 사람들 중에는 유저가 눈에 띄지 않았다. 룸잡고 떡치나. 하긴 거의 게이들일테니 여자랑 춤추는 것도 관심없을라나.


"저렇게 지들끼리 추는 거면 몰라도."


녹은 사탕처럼 달고 끈끈하게 서로를 더듬는 남정네들을 지나치며 혀를 내민다. 건장한 사내 둘이 저러고 있으니 세상이 참 말세였다. 대체 누가 여자역이야? 두명 다 근육질의 사내놈들이라 서로 물고 빠는 것이 상상되질 않아 머리를 흔들었다.


"마티니. 젓지 말고 얼음이랑 같이 흔들어서. 베르무트는 스윗으로 해주고."


간만에 클럽에 온 기분이라도 낼까 싶어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는 칵테일을 주문해본다.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한쪽 구석에 도도히 기대어 서있는 마담이 보였다. 온통 보랏빛인 공간에 어울리게도 온통 자주색으로 치장된 몸이었다. 마티니, 나왔습니다. 올리브가 담긴 투명한 술이 작은 잔에 담겨 제 앞까지 밀어졌다. 향긋한 향이 기분 좋아 홀짝이자 역시나 쓴 맛이 강했다. 대체 이런걸 왜 돈주고 사마시는지 알수가 없다니까. 머리까지 찌르르하게 울리는 알콜내에 미간을 찌푸려 고개를 흔들었다. 쿡쿡, 하고.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뭐야. 너냐?"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안부를 묻는 남자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만나는 듯한 태도여서 헛웃음이 나왔다. 야, 우리 딱 한번 얼굴 본 사이거든.


"왜 친한 척이야."
"이런... 죄송해요. 그래도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가워서요."
"하하, 지랄. 이벤트 끝나기도 전에 말도 없이 로그아웃해버린 주제에 낯짝도 두꺼우셔."
"으음. 그때는 미안했어요."
"알면 됐어."


온통 하얀 남자는 닉네임에 어울리는 고상함으로 미소지었다. 그 천사같은 얼굴에 왜인지 질리는 느낌이라 잔에 담긴 마티니의 향을 맡았다. 냄새를 맡는 순간 방금 전의 쓴맛이 강하게 떠올라 더는 마시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어버렸지만. 더 안마셔요? 턱을 괸 채로 저에게 몸을 틀은 엔젤이 순하게 물어본다. 나 원래 술 싫어해. 주랴? 마시고싶어? 찰랑거리는 술잔을 밀어주자 상냥하게도 손을 들어 사양한다.   


"하민씨도 메시지 창보고 온거예요?"
"어어. 히든 스테이진가 뭔가. 재밌어보여서."
"그렇군요."
"그쪽도 그거때문에 왔어?"


그럼 같이 찾을래? 어느 때고 시기를 가리지않고 불쑥 불쑥 찾아오는 변덕이 고개를 들어 남자와 일종의 동맹을 제안해본다. 사실 혼자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게 빨리 끝내고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지만 하민이나 남자에게 그런 사족을 구태여 설명 하고 설명 들을 건덕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3.

"마담, 요새 재밌는 소문이 있던데."



4.

메시지가 시킨대로 키워드를 말하자 카멜리아에게서 소문의 진상을 파헤쳐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무슨 RPG게임같네. 소싯적에 몇번 해보았던 게임들을 상기시키며 클럽 내부를 돌아보기로 하자 엔젤은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의욕있어 보이는 행색은 아니었지만 저 역시 그렇게 목매단 퀘스트는 아닌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였다. 


"역시 탐색은 화장실이지."


조사하면 떠오르는 장소를 말하자 사내는 웃었다. 여전히 성자같은 미소였다.



5.

"아, 윽, 응 으응, 흐, 하아."
"후으, 야, 밖에 다 들, 으, 려."

"어 시발 존나 입체 서라운드로 짱짱하게 들린다."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화장실은 대부분의 칸이 닫혀있었다. 그 닫힌 칸막이 안에서 각자 다른 목소리들이 열심히 실황중계들을 하고 있어 하민은 치를 떨었다. 미친, 떡은 호텔가서 쳐! 어설프게 닫힌 문짝 하나를 걷어차자 안에서 식겁하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땅을 기는 듯한 수컷의 욕지거리에 다시 한번 문짝을 차주면 그제야 안쪽이 조용해지었다. 철벅거리며 살이 부딪히는 소리들는 도무지 끊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앙앙거리는 사내새끼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정하민은 만족했다.


"재수없게 진짜. 야, 대충보고 나가자."
"네에. 그래요."


화장실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채 모텔 방이 되어버린 공간에서는 뭘 뒤져도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아 짜증스럽게 내뱉으면 엔젤이 또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뭘해도 긍정의 말이 돌아오는 느낌이 퍽이나 이질적이라 저도 모르게 기분이 날카로워져 엔젤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나긋이 웃는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팩하니 돌아 비어있는 칸막이를 열었다. 옆 칸에서 물고 빠는 소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들렸다. 




by 포도껍질 2015. 7. 28. 11:31



-


싸구려 초콜렛의 단맛이 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이를 세운 행동은 다분히 반사적이었고 본능이었다. 그것이 엔젤의 손가락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이미 힘껏 깨문 후였지만 하민은 상관하지 않았다. 개시발. 어거지로 남한테 입술박치기를 하면 이정도는 각오했겠지. 본인의 과거따윈 지워버리고 남이 저한테 하는 것만 기억한다. 몇번이고 친지들에게 지적당하는 하민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잘 참고있으니 된거아닌가. 저의 안하무인적인 성격을 정당화하며 멀어지는 남자를 보았다. 입 안에서 녹아가는 초콜렛이 달았다.


"뭐야, 시발."


엔젤의 등 너머로 무언가 빛이 번지는 것 같아 눈을 비빈다. 뭔 아이템이라도 썼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 와중에 마지막 커플 미션이랍시고 온 메시지가 가관이었다. 사랑한다, 라는 말만 하면 되는 거는 차치하고, 호감도 상승 효과는 또 무슨 지랄 염병이지. 


"눈 아파요?"
"꺼져봐, 좀."


눈꺼풀을 거칠게 비비자 남자는 한걸음 다가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제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집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 또라이같은. 게임에서 약까지 쓰는 미친 짓을 해? 이제보니 엔젤의 뒤에 비치는 것은 좆같은 이벤트 효과에 의한 착시현상인 듯 하였다. 존나 후광쩌시네요. 사내의 얼굴마저 빛에 가려 보이지 않을 지경이라 하민은 차라리 눈을 가렸다. 


"눈 아파."
"저런, 괜찮아요?" 
"아니. 존나, 개같아."


어절 단위로 끊은 단어들을 가까스로 혀 밖에 내면서 하민은 한숨을 쉬었다. 난 따지자면 여자가 더 좋아. 사내새끼한테 두근거리고 싶진 않다고. 떡치는 건 관심있지만. 제 앞에서 저를 내려보는 남자를 향해 다시 눈을 연다.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야."
"네?"
"존나 시발. 사랑해."


이게 미션이라면 그냥 말해주고 끝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가슴이 따끔거리고 손 끝이 차가워지는 감각따위를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내뱉은 사랑의 말이 진흙처럼 철벅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발바닥을 삼키는 진창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빈 속에 감기약을 먹은 기분이다. 약물이나 효과에 의해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머리를 울려와 결국 입가를 가려버렸다. 토하고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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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껍질 2015. 7. 28. 11:30



시스템 창이 꺼지자마자 손 안으로 무언가가 나타나는 감촉이 들었다. 손바닥을 펴보면 초록색 은박지로 쌓인 병모양의 초콜렛이 있다. 위스키봉봉이잖아. 그것도 꼬냑. 술을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무지막지하게 싫어하는 종류의 초콜렛인지라 인상을 찡그리자 하얀 남자가 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안좋아하나봐요?"
"너무 독하니까."


어차피 제가 먹을 건 아닌지라 남자의 손 안에 작은 병모양의 그것을 쥐어주었다. 어떻게 마시는지는 아냐? 허여멀건한 눈이 웃음기와 함께 위스키봉봉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까는 손길이 느릿하지만 섬세했다.


"디저트류는 좋아하거든요."
"내 보기엔 술안주다만."


아득, 하고. 거꾸로 들린 초콜렛 병의 바닥을 배어무는 남자의 입가로 초코틀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도수높은 알콜을 입에 털어넣는 모습이 엔젤의 겉모습과 유리된 느낌이었다. 술 잘마시는 천사라. 가톨릭계가 주당들이 많긴 하지. 전혀 관련없는 쪽으로 생각을 전개시키는 사이 병모양의 초콜렛을 입 안에 넣고 굴리는 남자가 저에게 가까워졌다.


"뭐야."
"답례요."


살풋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남자가 저와 눈을 마주쳤다. 눈높이를 맞춘 덕에 투명하게 파란 눈동자가 바로 제 눈 앞에서 깜박인다. 내뱉는 숨에서 독한 꼬냑 향이 났다. 키스해도 되나요? 입술이 맞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떨어져있는 거리에서 묻는 남자가 우스워 목덜미를 끌어당겨 아랫입술을 물었다. 현실도 아니고, 고작해야 게임 속 이벤트에서 뭘 그렇게 물어. 부드러운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어 핥았다. 알싸한 알콜내가 혀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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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껍질 2015. 7. 2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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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딱 보기에도 얼굴에 나는 상냥합니다, 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듯한 인상이었다. 말투도 사근사근하고 몸짓조차 나긋하다. 그런 엔젤을 보며 하민은 저게 바로 게이의 정석이 아닐까 생각했다. 잘못 주입된 선입견이었지만 하민에게는 그것을 지적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엔젤의 첫인상은 '존나 게이같은' 이 되어버렸다. 물 흐르듯이 섬세하고 가볍게 제 허리를 끌어 당기는 몸이 보기보다 컸지만 수컷의 위압감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역시 이러한 첫인상에 쐐기를 박는 요인 중 하나였다.


"하민씨."


귓가에 가까이 닿은 입술에서는 날숨과 함께 제 이름이 섞여 나왔다. 이걸 로맨틱하다고 해야하나 오글거린다고 해야하나. 이미 후자쪽으로 기운 마음을 빌어 만국 공통어인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줄까 했지만 온통 새하얀 남자에게는 욕설조차 별다른 느낌을 주지 않는 듯 하였다. 저와 만난 짧은 시간동안 대화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비속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절한 것을 보면, 사내는 정하민이 꽤나 불편해하는 축의 인간상이 틀림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벤트를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즐기지 않으면 손해였다. 그저 끌어안고 이름을 말하면 된다. 손을 뻗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제 어깨에 턱을 올려놓은 남자의 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저를 안느라 구부정하니 굽은 등이 보였다.


"엔젤."


남자의 이름을 부른다. 남자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여전히 말랑거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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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껍질 2015. 7. 28. 11:29




1.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2.
 
이 곳은 진짜 남탕이었다. 
 
 
 
3. 
 
한달정도 전에 신청해놓은 베타테스트 서버는 야근과 특근에 쫓기어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하민은 제가 그런 걸 신청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있었다. 선발메일이 온 후 이름이며 뭐며 자잘한 것들을 정하기 위해 잠깐 접속했던 것 말고는 기어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잠들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민은 요즘 많이 쌓여있었다. 여자의 매끈한 살결이 손 안에 감겨오는 느낌이 그리웠다. 핸드폰 주소록을 뒤져보아도 마땅한 여자는 없다. 당연한가.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여자들은 안전하고 확실한 섹스를 원하는터라 미라클 내가 아니면 몸을 잘 허락하지 않았다. 저 역시 이 나이에 애아빠라는 타이틀을 얻기에는 영 거북스러워 굳이 현실에서의 관계를 고집하지 않기도 하고. 진짜로 하는 게 확실히 더 맛이 있지만 그 정도도 참지 못하면 인간타이틀 반납하고 고릴라나 되는게 낫지. 언제나처럼 의자에 앉아 돔을 내리며 생각했다. 시야가 까맣게 내려앉았다.
 
 
 
4.
 
이 호텔이 원래 이런 이름이었나. 맵을 선택하기 위해 띄운 창에는 생소한 이름의 장소들이 여럿 있었다. 접속하지 않던 사이 꽤나 업데이트가 되었다고 느끼며 호텔을 선택한다. -접속하시겠습니까? 불투명히 떠오르는 창에서 당연하게도 YES를 눌렀다. 풍경이 이지러지며 호텔 프론트로 변해가는 과정은 언제보아도 어지러운 광경이었다. 
 
 
 
5.
 
"좆같네."
 
 
풀썩, 하고. 푹신한 쇼파에 몸을 내던지며 한숨처럼 욕설을 흘렸다. 왼손목을 들어 올려 접속한 스마일의 친구목록이 깨끗하다.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던 여자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저를 차단했을리는 없고, 그제서야 이 맵의 이상한 점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남자, 남자, 남자. 그리고 또 남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같이 여자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낮은 음성들 뿐이었다. 호텔 프론트에 원래 이렇게 여자가 없었던가로 머리를 싸매보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베타서버에 신청서를 냈던거지. 거칠게 뒤통수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암만 눈을 씻고 보아도 저와 같은 게 달린 것이 분명할 놈팽이들 뿐이었다. 우웩, 혀를 빼내어 토하는 시늉을 하며 미련없이 등을 돌린다. 이왕 접속한거 사우나나 한번 하고 가자. 차라리 접속을 끊고 현실의 사우나를 가는 것이 나을 법도 했지만 한번 집에 들어온 몸을 밖으로 몰아내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다.
 
기분만이라도 내고. 내일 일어나서 목욕탕이나 가자.
 
근 한달만에 받은 온전한 주말을 오로지 본인을 위해 쓸 것을 다짐하며 휘적휘적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는다. 사우나 시설이 있는 층수를 확인하는 얼굴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하였다.
 
 
 
6.
 
나무로 된 두꺼운 손잡이를 당기자 후욱, 하고. 사우나 안의 뜨거운 공기가 바깥을 향해 몰려나왔다. 아, 좋다.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노곤해지는 온도였다.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을 향하자 생각보다 한산한 내부가 보였다. 다들 물고빠느라 사우나는 잘 안오나. 하긴 호텔의 존재의의는 그 짓거리뿐이긴 하지. 어찌됐든 나야 좋네. 미라클 안에서까지 사람에 치이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저 외에는 사람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아, 존나 좋다.'
 
 
사우나의 온도는 과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을 태우는 것 같았던 현실의 사우나를 생각하자 어쩌면 미라클 내에서 사우나를 즐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이 거슬려 고개를 털면 뜨거워진 머리카락이 볼에 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묶고 들어올걸 그랬나. 뺨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덩어리들을 떼어내 한손으로 묶는 시늉을 해보지만 근처에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결국 목덜미로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손을 떼었다. 
 
그나저나 베타서버는 어디서 정보를 찾아봐야하지. 아무래도 당분간은 원래의 미라클에 접속할 수 없을테니 앵간한 것은 모두 다 테스트서버에서 해결해야했다. 공식홈페이지에 가면 있나. 양반다리를 한 채로 허벅지를 가린 타올을 가지런히 펼치며 빙글빙글 머리를 굴린다. 옆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어 끄응,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나 좀 들어와라. 바람을 담아 문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제 운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뇌를 유영하던 단어들이 사우나 밑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문 틈새가 열리는 것을 보면.
 
 
"어."
 
 
눈을 내리깐 채로 들어오던 남자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는지 잠깐 주춤거렸다. 뭐야, 양키인가. 딱 봐도 이국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남자를 훑어보았다. 젖은 밤색 머리칼 아래 옅은 녹색 눈동자가 있다. 머리카락보다 약간 연한 색의 구릿빛 몸체가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것이 꽤나 강한 섹스어필로 작용할 듯 싶었다. 문신쩌네. 남자의 양 팔을 가득 메운 그림에 슬쩍 제 팔뚝을 내려보았다. 밋밋하니 허연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좀 아바타를 바꿔볼 걸 그랬나. 제 주변에는 문신한 사람이 없는지라 화려한 팔뚝의 사내가 그저 신기했다. 물론 제 성격 상 오래 갈 호기심은 아니었지만. 

근데 희안하네. 뭔가 낯이 익은데 기억이 안나. 같은 수컷에게 금새 흥미가 식을 법도 하건만 어딘가 찝찝하게 느껴지는 기시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시발, 어디서 봤지. 뒤통수를 매만지며 열심히 짱구를 굴리는 사이 남자는 제 맞은편에 와 앉았다. 아니, 부담스럽게 왜 마주앉고 지랄이야. 사내의 눈매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저를 관찰하는 것인지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이 매우 거북스러웠다. 어쩐지 탐색당하는 기분이라 잇새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기억이 나질않는 것을 보면 저에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무시하자. 무시. 무시.
 
 
 
7.
 
어쩐지 점점 노곤해져 깜빡깜빡 졸음이 찾아왔다. 여기서 자면 죽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보다 따끈하니 좋은 것이 가상현실 내에서도 피로회복이 되는 것이 신통하다는 느낌이 더욱 커 몰려 오는 졸음을 굳이 참지않았다. 저 남자도 그런가. 말없이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TV에서나 나올 법한 짙은 근육질의 몸이 여자 여럿 울렸을 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저가 접속해 있는 이곳은 게이천국이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주 약간 잠이 깨었다.
 
 
"저기."
"음?"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은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궁금한 건 바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제 얼굴은 아마 상대방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몸이 좋네."
"그것 참 고맙군."
 
 
칭찬이겠지? 하고, 확인하듯 웃는 남자의 얼굴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진짜 여자 엄청 후렸을 새끼일세. 
 
 
"여기, 게이용 미라클이지?"
"...그렇지."
 
 
불쾌할 법한 질문에도 대답해주는 남자의 몸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쪽은. 하고, 입을 뗀 남자가 말을 잇는다. 여기에 처음 접속했나? 이쪽 취향은 아닌것 같은데. 뱀발처럼 달린 말을 끝내며 저를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예뻤다. 뭐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여전히 알수없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보다, 당신. 인기 많아?"
"뭐?"
"아니. 몸이 존나 좋길래. 남자보다는 여자한테 인기있을 법한 몸 아닌가?"
 
 
아니면 역시 여자한테 인기 많은 쪽이 남자한테도 인기 많은가? 느낀 점을 가감없이 말하자 남자가 웃는 것이 보였다. 입가 사이로 보이는 치아가 육식동물의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이 인기 있어보이나?"
"하핫. 까고있네. 몰라서 묻는건 아니겠지?"
 
 
누가 봐도 여자 쩔게 후리게 생겼거든, 당신? 웃으며 머리를 털었다. 물기가 가신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했다. 자그마한 바가지에 떠온 물을 머리 위로 붓자 그제야 건조함이 가신다. 남자가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리다 이내 웃었다. 궁금하면.
 
 
"직접 해보는건 어때?"
"뭐를. 섹스를?"
"그거 말고 여기서 또 할게 있나."
"그쪽이 대주나?"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을 내뱉으며 울대를 울렸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폼이 꽤나 달갑지 않은 말을 들은 듯 했다. 하기사. 저와 남자의 체급차는 제가 위로 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저 몸집에 비해 내 아들내미는 작을 것 같단 말이지.
 
 
"그 자신감은 마음에 드네."
 
 
나른한 육식동물처럼 남자는 여유있게 웃었다. 하민 역시 괜시리 유쾌해져 입을 벌렸다. 웃을 때마다 습기찬 공기가 목줄을 죄여와 무언가 들뜬 기분이 된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남자가 앉아있는 곳까지 발걸음을 옮기었다. 제 보폭으로도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거리는 금새 좁혀졌다. 외노자양반, 내가 뒤는 못따여줘도 말이야.
 
 
"사내새끼 입술이 무슨 맛일지 궁금하긴 해."
 
 
몸을 숙여 올리브색의 눈동자를 마주본다. 아무 말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반응 존나. 재미없네, 시발. 끊어질 생각을 않는 적막이 부담스러워져 시선을 돌렸다. 어딜, 하고. 시선이 엇갈리는 찰나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제 뒷목을 끌어당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술이 부딪혔다.
 
물어뜯을 듯이 이를 세워 입술을 물다가 이내 벌려져 있던 입새로 혀가 파고들었다. 무방비하게 가라앉아 있던 정하민의 혀가 돌연 끌어올려졌다. 마치 싸움을 거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허, 이것 보게? 그러나 당황은 찰나였고 대응은 순식간이었다. 시발. 그래. 해보자고.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땀인지 습기인지 모를 것들로 미끈거리는 탓에 몇번인가 손이 미끄러져 남자의 몸에 상처를 남겼지만 개의치않았다. 게임에서 다치는게 뭐 대수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제 혀에 힘을 주어 휘감고 있던 남자의 혀를 아래로 내리누른다. 서로 리드하려는 혀를 제압하기 위해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지속되자 턱이 아려왔다. 이윽고 작은 살덩이들의 놀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뿌리까지 얽혀드는 농밀한 것으로 변해갔다. 츄, 츄읏, 혀와 입술이 빚어내는 소리가 축축하게 귓가를 때린다. 충동적으로 벌려진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았다. 
 
얽히는 시선이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주도권을 요구한다.
 
후우, 하고. 긴 숨이 입술 틈으로 새다가 곧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혀가 저릿저릿했다. 그래서, 감상은? 포식자의 얼굴로 묻는 남자를 향해 웃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좆같네, 새끼야."
 
 
가운데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펼치며 혀를 내밀었다. 입술을 핥는 남자의 혀를 잡아 빼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며 반걸음 뒤로 물러나면 남자는 여전히 맹수처럼 웃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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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껍질 2015. 7. 28. 11:28



by 포도껍질 2015. 2. 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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