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맥은 과거에 관심이 없다. 지난 날을 생각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사내의 젖가슴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이라서, 목적의식없는 자위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꿈이고만, 이거.'
그렇기때문에 맥에게 있어 과거의 무언가가 나오는 꿈은 퍽이나 새로운 것이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꾸지 않지만, 어쩌다가 꾸는 꿈들도 제가 마왕이 된다거나 하는 유쾌한 내용들 뿐이라 이렇게 진창처럼 질척이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기분나빠. 힘을 가한 어금니가 맞물려 빠득이는 소리가 났다. 당연하겠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2.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화사하고 밝았다. 크, 어렸을 때의 나는 역시 귀여워. 성당 내에 위치한 모래놀이터에서 흙을 쌓아올리는 저의 어린 시절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은 반짝이고 하늘은 맑다. 두꺼비집을 만드는 모양인지 쌓아올린 흙을 토닥이는 어린 저도 즐거운 눈요기가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그마한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며 어린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열중하다 이내 즐겁게 웃는 모습이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평범하게 살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고난이나 역경따위는 없는 저의 삶을 떠올린다. 흔히 말하는 불행 자랑이라고 해봐야 성적이 나오지 않아 아버지가 게임기를 숨겨버렸다 같은 시답잖은 것들 뿐인 인생은 정말이지 순탄했지만 그만큼 재미가 없었다.
"그래. 재미없지."
어느새 나타난 수녀님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떠나는 어린 자신이 보였다. 그 앞에는 저를 기다리는 엄마가 손을 흔들고 있다. 오, 우리 엄마는 역시 예뻐! 나의 맥, 잘 놀았니? 저를 안아 들고 방긋 웃는 모친을 따라 어린 저가 웃었다. 어머니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날의 기억이 저를 본다. 지루해. 벙긋거리는 작은 입이 그리 말을 하였다.
3.
[세계는 결코 천국이었던 적이 없다. 옛날은 더 좋았고 지금은 지옥으로 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언제 어느 때에도 불완전하고 진흙투성이여서, 그것을 참고 견디며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과 신념을 필요로 했다.]
4.
캬, 멋진 말이야. 성당의 빈 공간을 울리는 명언에 절로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헤르만 헤세. 과연 신학계 집안에서 자란 형씨다운 말이지. 사랑과 신념! 저 남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작게 키득거리며 단상에 선 저의 대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새로 취임했다는 젊은 보스는 어설픈 표준어를 사용해가며 무어라 장황한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여 슬쩍 혀를 내밀면 가늘게 접혀진 눈매 속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던가? 여우를 닮아 샐쭉하니 올라간 눈초리는 도무지 눈동자라는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하이고마."
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남자는 손을 들어 연설문을 들어올리었다. 어색했던 표준어 대신 자연스러운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느그들도 재미없제?
"못 본 새 마이 복잡해졌구마. 와 이래 장황해가."
들어올렸던 종이쪼가리들을 다시 내려놓으며 남자는 빙글 웃었다. 실로 뱀과 같은 미소였다. 기분 좋게 올라간 입매 사이로 드러나는 것이 여우의 송곳니인지 구렁이의 독니인지조차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내 말이다. 단상 아래 늘어선 본인의 예비 수족들을 굽어 살피사 피조물을 바라보는 신과 같은 모습으로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려뵈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적막 속에서 맥은 혼자 웃음을 참았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웃으면 안된다는 것쯤은 안다고! 속으로 씹어삼키는 대답이 위장으로 넘어가 시큼한 산성액에 녹아간다. 채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담겨있을 눈동자로 올려다보기에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위압감이 부담스러워 그저 저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푸핫, 하고. 사내가 웃는 소리가 들리었다.
"이 도시에 와가 뭘 배웠능교? 더럽제. 이기도 별 다를 기는 없다."
뭐어, 어디든 똑같지 않나. 중얼거리며 바닥을 치자 젊은 보스의 말이 이어졌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내는 상관없데이. 앞으로 느그들이 무얼 할지도 사실 상관없다. 낮은 목소리가 바닥에 깔려 안개처럼 흐릿하게 발목을 휘감았다. 저런 방관주의, 내가 아주 좋아죽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든다. 세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하나 둘씩. 단상 위에 올라가는 사제차림의 남자들이 보이었다.
5.
이제 곧, 저의 차례였다.
6.
왼쪽 손바닥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이나 손등에 칼빵을 낸 적은 있어도 손바닥은 처음인데. 아픔을 즐기는 변태는 아니었던 지라 조금 주저하며 날을 세운다. 손바닥을 찢는 느낌이 너무 적나라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받으레이."
성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건내주는 남자의 입매를 바라본다. 아이고, 성모님.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모서리부터 불이 번져가는 그것을 왼손으로 잡아 쥐었다. 타들어가는 불씨로 상처가 지져지는지 영 좋지못한 냄새가 풍기었다.
"재가 됐네요."
오른손으로 작게 성호를 그으며 마리아의 극락왕생을 빈다. 바이바이, 성모님! 당신의 영광이.
"우리 보스에게 이전되길 빕니다, 아멘!"
손을 털자 피와 한뭉치가 되어버린 재가 떨어지었다. 찢기고 지져진 안쪽이 따끔거려 혀를 씹는다. 허여멀건한 남자의 손을 들어올려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면 쇠 맛이 났다. 이런. 죄송해라. 입술을 떼자 반점처럼 묻어난 저의 피를 슥슥 닦으며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실수니까, 봐주십쇼? 말끔해진 사내의 손등을 가볍게 쓸자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올라갔다. 또아리를 튼 뱀이 눈을 접어 웃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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