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어제 출근길만 해도 고개를 들면 분홍색 꽃가지가 흔들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밤새 내린 비는 땅으로 꺼져 죽은 웅덩이의 비린내를 풍기고있었다. 물방울에 처맞아 아래로 추락한 꽃잎들이 바닥을 수놓는다.
시선을 올려 위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꽃덩어리들이 볼품없었다.
2.
이번 해에도 꽃놀이는 꽝이었다. 어차피 올해에는 같이 갈 여자도 없지만.
3.
선심쓰는 듯한 말투에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이 올라갔다. 메시지창에 대고 엿을 날리는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보일지는 정하민이 알 바 아니었고,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왕 계승식이라는 단어 한가지 뿐이었다. 요정이라 이거지. 쭉빵 엘프가 나와준다면 바랄 바가 없을텐데.
한줄기 기대를 걸며 날짜를 확인한다. 아오, 미친. 월요일이네. 하필이면 일이 제일 많이 몰리는 월요일 밤이 이벤트 날인지라 뒤통수를 긁었다. 뭐어, 꼭 봐야하는 것도 아니고. 운 좋으면 보고 아니면 말면 되겠지. 딱 그정도의 이벤트인지라 뒷목을 주물렀다.
4.
그리고 생각보다 제 운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확 인상을 구기자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이 형은 게이였지. 요새 연락이 안된다 했더니 게이천국에서 놀고 계셨어?
"미니미니, 너 왜 여기 있냐...?"
정말 꽉막힌 동네야, 여기는. 시발 게이만 게이콘텐츠를 이용하라는 법이 대한민국 헌법 어디에 써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짜증을 내자 쌍꺼풀없는 더러운 눈매가 확 올라갔다가 이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저만큼이나 성질 더럽게 생겼지만 그렇게 개차반은 아닌 형인지라 제 짜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과연 황진영답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뭐라 말하는 것들을 대충 흘러 대답하며 씨익 웃었다. 보아하니 저 형도 혼자고. 나도 혼자고. 게이들한테 헌딩당할 거 방해하는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나 편할게 먼저니까.
"어이구, 형님은 나랑 그렇게 데이트가 하고싶으신가봐?"
아마도 죽빵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야비해보일 것이 분명한 얼굴로 이죽거리며 말하자 콧방귀와 함께 턱짓하는 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제가 여자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눈동자가 저를 보고있었다. 우웩.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얼른 진영의 손목을 잡아채 걸음을 옮기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마도 시간이 되었는지 물안개와 함께 몽환적인 정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를 두고 척척 걸어가는 까만 뒤통수를 따라 발을 움직인다. 걷는 족족 자그마한 요정들이 까르르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5.
솜씨좋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요정은 여왕이 되었다. 크기가 작을 뿐 인간 여성과 다르지 않은 몸을 가진 여왕이 웃었다. 누굴 참고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절세미인 뺨을 후려치는 자그마한 미인은 마치 꽃송이같았다. 주위에 몰려있던 요정들이 탄성과 웃음을 뿌리며 유저들에게 떨어진 꽃봉오리며 과일들을 선물한다. 저에게도 무언가를 계속 안겨주는 요정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진영을 찾아 시선을 돌리었다. 나가고 싶었다. 역시 저는 작은 생물과는 선천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형."
"엉?"
"삼겹살에 소주나 하러 가자."
"나 내일 출근하는데."
저도 출근이거든요. 흡사 본인만 출근하는것 같은 말투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짜증낼 기력까지 억지로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억지로 성불당하는 악령이 된 듯한 기분이야. 요정들의 축제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요지부동인 진영의 팔을 잡아끈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에 대고 이를 간다. 아, 진짜!
"내가 산다니까!"
6.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콜을 외치는 진영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것을 어거지로 참으며 로그아웃 하자 바로 걸려오는 전화를 확인한다. 진영이형님. 저번에 내 폰을 잡고 뭘하나 했더니 이름을 바꿔놓으셨어요? 허탈한 웃음과 함꼐 통화버튼을 누른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디로 가면 되냐?
"어디긴 어디야. 내일 출근아니면 우리동네로 오라할텐데. 걍 중간에서 보자."
"오냐, 그럼 합정?"
"어어."
자리에 일어나 대충 손에 집히는 아우터에 팔을 꿰며 바로 나와, 하자 알았다며 통화를 끊는다. 아, 모르겠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형만한 아우없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간만에 진영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피로감에 묶여 질질 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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