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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참 빌어먹게도 맑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깨끗한 색이었다. 거래처 과장놈에게 질리도록 시달린 제 기분과는 영 딴판이라 부럽기까지 하다. 이젠 하다하다 자연까지 부러워지다니 막장이고만. 지끈거리는 미간을 꾸욱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사무실에 들어갔다간 제 명에 못 죽지 싶었다. 들어가자마자 잘 해결했냐느니 거래는 어떻게 될 것 같냐느니 저를 귀찮게 할 것이 눈 앞에 선했다.
"카페인... 카페인이 필요해."
대낮부터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실 수도 없고 피지도 않을 담배를 땡겨 물수도 없는 노릇이라 유일한 도피처인 카페를 찾는다. 회사 근처로는 갈 마음이 영 들지 않아 무작정 걸었다. 차와 멀어질까 염려되었지만 근처에 카페 하나 없을까. 무엇보다 우연히도 이곳은 제 집과 거리가 가까웠다. 뭐하면 그냥 주차비 폭탄 맞고 내일 출근할 때 가져가면 되지.
학생인지 백수들인지, 그도 아니면 휴가나온 직장인인지 모를 것들로 드글거리는 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에 묻혀 걷는 것은 출퇴근을 할 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분위기만은 사뭇 달랐다. 좋다고 웃고들 지랄이네. 피곤에 찌든 눈은 모든 것을 고깝게 바라보았다. 눈이 시큰거려 눈두덩이를 가볍게 누른다. 어제 만난 여자가 브로콜리를 그렇게나 추천해줬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스트레스는 고작 브로콜리따위로 해결될만큼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 낯빛이 낫기 위해서는 일을 때려쳐야 해. 근데 지금은 사표보다도 커피, 커피. 아니면 당.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아무 카페에나 들어간다. 후욱, 하고. 풍겨오는 원두 냄새가 따뜻했다.
"어서오세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사이로 몸매 좋은 중년이 인사를 해왔다. 아니, 중년이라기엔 젊나? 중장년 즈음? 어찌되었던 방금 만나고 온 과장과 비슷해보이는 연배였다.
"아 진짜 시바알..."
단지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사람을 봤을 뿐인데 짜증이 솟구쳤다. 울렁거리는 불쾌감이 울대를 끈적하게 기어올라와 가래가 낀 듯 답답했다. 아마도 형편없이 구겨졌을 저의 미간때문인지 아니면 읊조린 욕지꺼리때문인지 웃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잠시 굳어졌다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감정 컨트롤에 능해보이는 남자다. 서비스업은 역시 힘들지. 근데 나도 영업하느라 힘들어.
엄한 사람에게 욕설을 뱉었다는 데에서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정하민이라는 남자는 마음씨가 곱지 않았다. 시간대 탓인지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 안을 둘러보다 메뉴판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런데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카페 안도 눈에 익었다. 아마도 언젠가 들려본 적이 있는 카페였던 듯 하였다. 집이랑 멀진 않으니 오다가다 들린 적이 있었나. 중요치 않은 일에까지 머리를 굴리고 싶지않아 금방 생각을 그만두었다.
"저기."
검은 더벅머리 아래 깊게 쌍꺼풀 진 눈이 제 목소리에 반응해 웃음을 그렸다. 초면인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입 험한 어린 놈에게까지 카페주인의 본분을 다하려하다니 소명의식이 투철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우직해보이는 몸과 얼굴에 한껏 부드러움을 담은 채로 남자가 물었다. 주문. 그래, 주문해야지. 마시고 또 회사에 들어가서 야근을 해야하고 집에 가서는 얼마 자지도 못하고 다시 출근을 하겠지.
"아, 진짜... 싫다..."
"네?"
"저기요, 사장님."
"네."
차가운 핫초코 주세요. 슬슬 피곤함에 제정신을 잃어가는 머리를 쉬게 해주기 위함인지 입이 알아서 지껄인다. 사실 평소와 다른 패턴도 아닌 평상시의 언어습관이 나올 뿐인지라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이스초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핫초코요. 차가운걸로."
"음, 그러니까 아이스초코..."
아니라니까요. 씹어뱉듯이 말하자 남자가 곤란해 하는 것이 보였다. 이 집은 차가운 핫초코가 없나. 아니면 주인이 날 놀리나. 눈이 뻑뻑해져 잠시 눈을 비비었다. 아, 진짜 당떨어졌나.
"그거 없으면 치약맛 안나는 민트초코요."
"...네?"
"치약맛 안나는 민트초코요."
"죄송하지만 손님, 혹시 저랑 장난하십니까?"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남자의 훤칠한 얼굴에 여러가지 빛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당혹감과 불쾌함이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왜 저 사람은 내가 지어야할 표정을 자기가 짓고있어. 숨과 함께 들이 쉰 피곤이 위장을 가득 채웠는지 속이 영 거북해 눈썹을 비틀자 남자는 끄응, 하고.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곧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카운터에서 등을 돌리었다. 남자의 다부진 어깨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음료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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